
무제
조로 개
파 @_xSanji
몽롱한 아침의 감각 사이로 햇살이 쏟아졌다. 그 틈 사이로 캉캉 짖는 명랑한 소리가 귓전을 찔러온다. 확인할 필요도 없이 루피였다. 그리고 가슴께의 이 묵직함은 나미겠지. 부스스한 정신에 손만 뻗어 털을 쓰다듬으니 머리를 부벼온다. 산지는 이 사랑스러운 행동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당장 일어나서 밥을 대령하라는 뜻이다. 몸을 일으키려는 기색을 보이자마자 미련 없이 등을 돌리는 도도한 걸음걸이가 그 증거였다. 알람시계가 필요 없을 정도로 한결같은 패턴. 산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나와 같은 동선으로 부엌을 향했다.
거의 발목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부엌까지 쫓아온 루피는, 이제는 몸에 밴 동작으로 사료 봉투를 기울이자 기다렸다는 듯 떨어져나갔다. 나미까지 그릇에 코를 박는 걸 확인한 산지는 다시 침대 맡으로 돌아갔다. 그곳엔 홀로 아직까지 단잠에 빠져있는 조로가 있었다. 루피가 그렇게 짖어댔음에도 불구하고 미동조차 없다. 조로, 아침이야. 코앞의 그릇에 사료를 부어주며 몸을 흔드니 까만 외눈이 번쩍 뜨였다. 정말 하루도 안 빠지고 험악한 얼굴이구나. 위협적인 덩치에 한쪽 눈 위를 길게 지나가는 흉터까지, 당장이라도 날렵하게 튀어 올라 목덜미를 덥석 물어올 것만 같은 흉흉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전부 재미없는 망상일 뿐, 눈앞의 녀석은 다 늙은 나무늘보마냥 졸린 눈만 끔뻑이고 있다.
“밥 먹어, 밥.”
주둥이를 들어 그릇 앞에 대주고 나서야 조로는 느릿느릿 입만 우물거리며 식사를 시작했다. 상디는 바로 떠나지 않고 쭈그려 앉은 그대로 잠시 그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새삼 조로의 얼굴 위로 완전히 내려앉은 평화와 안정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저희들의 일상 속에 이리도 잘 녹아들어준 조로가 대견해서, 산지는 괜히 웃으며 머리를 부벼주었다.
“오늘은 손님이 올 거야.”
나도 대충 챙겨먹어야지.
*
“지금 내 눈이 잘못 된 게 아닌 거냐?”
“늘 잘못되어 있었잖아.”
“아니… 허….”
멍청하게 입을 벌린 꼴이 우스웠다. 믿을 수 없다는 욘지의 시선은 산지의 무릎 위, 정확히는 그 위에 늘어져 산지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는 조로에게 가 있었다. 산지는 동생의 솔직한 반응을 감상하며 낄낄거렸다. 넋이 나간 와중에도 내어준 차는 얌전하게 꼭 쥐고 있는 자세도 유쾌하다. 저게 사람 손인지 솥뚜껑인지.
“이제라도 적성 찾아 전향해야 되는 거 아니냐.”
“뭔 소리야 또.”
“사육사 같은 거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퍽 진심 어린 울림에 산지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욘지가 조로를 마지막으로 보았던 게 벌써 몇 달 전의 과거였으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게다가 그는 조로의 입양을 반대하던 무리 중 하나였으니까.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루피랑 나미는 어쩌고. 아무래도 공격적이고 사납지 않을까?’
“그랬는데 호전적이기는 커녕….”
“그런 문제는 전혀 없었어?”
“전혀. 애초에 걱정할 부분은 그쪽이 아니었어, 이 무식한 놈아.”
그럼 뭐가 문젠데? 정말 모르겠다는 듯 깨끗한 얼굴이었다. 꼴 같지 않게 순진무구한 얼굴이 한심했지만 산지는 순순히 대답해주었다.
“군견들은 태어날 때부터 본능을 억제하도록 훈련받기 때문에 우울증을 앓는 경우가 많아. 하는 일이 일이다보니 관절염 정도는 기본으로 갖고 있고. 그걸 다 감안하고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데려가야 해. 게다가 조로는 현역 중에 부상으로 은퇴한 경우니까 신경 쓸 부분이 더 많지.”
“아, 그래서 그렇게 무기력했던 거야?”
“아마도. 게다가 조로는 훈련이나 현장에 잘 적응하고 활약이 뛰어난 경우였다나 봐. 그런데 이렇게 크게 다치고 갑작스레 환경까지 뒤집혔으니….”
이제는 잘 아물어 아플 리가 없는데도, 흉터 부분을 만지는 손길은 늘 조심스러웠다. 상디는 처음 조로를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루피가 아무리 주위를 맴돌며 까불어도 반응이 없고 눈조차 마주쳐주지 않던, 그저 성격이 무뚝뚝한가 했더니 어느 날부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던 그 때의 조로를.
사실 당시의 산지는 반려동물을 더 들일 계획이 없었다. 심지어 군견이라니, 이미 소형 강아지와 고양이를 한 마리씩 데리고 있던 그로써는 아이들이 서로 친하게 지낼 수 있을지 까지도 고려해야했기에 꽤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우연히 접하게 된 군견들의 사정은 산지 같은 사람이 쉬이 외면하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그들은 군견 양성이라는 단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태어난다. 하지만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군견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재능이 없어 낙오되거나 몸이 망가진 개체들은 민간 입양 절차를 밟게 되는데, 기한 내에 입양자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락사 당한다. 그렇게 생을 마감한 시체들은 대학에 학술용으로 기증된다는 것이다.
산지는 제가 드물게도 군견을 입양하기 좋은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크게 짖어도 무리 없는 단독 주택을 가졌고 여러 치료를 책임져줄 경제적 여유도 충분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산지는 늘 그랬듯, 곤란하다며 뒤돌아버리지 못했다.
욘지는 당시의 조로를 만나본 전례가 있었다. 외눈이 익숙하지 않아 자꾸만 여기저기 부딪히고, 뒤바뀐 일상에 적응하지 못해 한쪽 구석에 엎드려 한 없이 잠만 자던 그때의 조로를.
“근데 잠만 잤던 건 원래 잠이 많은 것도 있었던 것 같아….”
두 사람의 시선이 제게 몰려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 와중에도 조로는 꾸벅꾸벅 의식을 놓기 직전이었다. 욘지는 그 얼굴을 유심히 관찰했다. 여전히 이곳저곳 날카로운 생김새였지만, 산지의 이야기를 들은 후여서인지 조금 덜 무서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욘지는 씨익 웃으며 조로의 코를 꼬집었다.
“헤헤, 이렇게 보니까 이 녀석도 꽤 귀엽… 으아악!”
월! 제가 언제 졸고 있었냐는 듯 커다란 입이 쩍 벌어지며 욘지의 손을 덮쳤다. 화들짝 놀란 욘지는 비명을 지르며 순식간에 멀찍이 물러났다. 눈물까지 그렁거리는 동생만큼은 아니어도 꽤 놀란 상디가 급히 붙잡아 진정시키는데도 조로는 날짐승마냥 으르렁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뭐야! 안 사납다며!”
“그러게. 이러는 거 처음 보는데.”
“내가 문제라는 거야?!”
“왜 애를 건드려 건들긴.”
“야!”
“아 알았어!”
조로, 사람을 공격하면 안 돼. 짐짓 엄한 목소리를 흉내 내지만 손은 부드럽게 털을 쓰다듬어주고 있다. 코 만져서 화났어? 쟤가 원래 좀 예의가 없어. 네가 이해해줘. 동생의 손목이 날아갈 뻔했는데도 개를 타이를 의지가 없어 보이는 태도에 욘지가 씩씩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아 알았어. 산지는 조로를 무릎 위에서 내려놓았다.
“조로. 곧 루피 일어날 테니까 저쪽 가있어. 형 얘기 좀 하고 있을게.”
조로는 꼭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곧장 무릎에서 일어났다. 순순히 물러나면서도 한 번 더 시선을 쏘아주는 것을 잊지 않는 모습에 기가 찬 욘지는 억울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사실 그는 조로의 서슬 퍼런 안광에 조금 압도당한 상태였다.-
“왜, 왜 나한테만.”
“니가 개보다 못하다는 증거지.”
“아 진짜!”
소란을 일으킨 장본인만이 평화롭게 배를 깔고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
-왜 그랬어?
부르는 말에 슬쩍 눈을 들어보니 정면에 나미가 와 앉아있었다. 루피가 깨기 전에 먼저 잠들어 버리려고 했는데. 이 앙칼진 고양이의 성미를 아는 이상 섣불리 무시할 수도 없다. 낭패라고 생각하면서도 조로는 되물어주었다.
-뭐가.
-저 커다란 사람한테 말이야. 너 그런 적 없었잖아.
-아….
조로는 별 시답잖은 걸 다 묻는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저 녀석이 저런 표정으로 보는 사람은 처음 봐서, 조금 겁을 줬을 뿐이야. 그런데 그 당연한 대답을 들은 나미의 표정이 이상했다.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이 납득되지 않아서 조로는 덩달아 미간을 찌푸렸다.
-멍청아. 저 사람은 산지의 가족이야.
-가족?
-그래. 다치기라도 하면 산지가 슬퍼할걸.
-애초에 진심으로 물어뜯을 생각은 없었어.
-하지도 않을 일로 왜 겁을 주니? 하여튼….
조로는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어리둥절해졌다. 이 고양이는 자신을 싫어하지 않았던가? 가끔씩 새초롬하게 눈을 흘길 뿐 근처에도 잘 오지 않더니, 뜬금없이 다가와선 괜히 툴툴 거리며 의미도 없는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조로는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바로 내뱉었다.
-갑자기 왜 그러냐?
-뭐?
-너 나 싫어했잖아.
-…참나. 그래! 싫어했지!
‘니가 뭔데 산지를 속상하게 해? 너 진짜 왜 그러는 거야. 적당히 좀 해!’
나미는 조로와 마지막으로 나눴던 대화를 상기했다. 사실 그건 대화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수준이었다. 그는 자신이 앙칼지게 쏘아붙이는 말들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으니까. 당시 나미는 그런 조로를 이해하지 못했고 반면 조로는 그녀를 이해하고 있었다. 조로는 우물쭈물하는 나미에게 그러냐, 대꾸해주고 말았다. 그는 그 날카로운 말들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미는 홀로 떠돌던 길고양이였고, 루피는 상자 속에 앉아 비를 맞던 어린애였다고 들었다. 산지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조로가 변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 온기 덕이었다. 딱히 마음을 열고 싶지 않았던 것도, 새로운 환경이 불만스러웠던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게 모르는 것 투성이었을 뿐이다. 험한 산과 들판이 아닌 폭신한 쿠션에 파묻혀있는 일이나, 외눈으로 세상을 보는 일이나, 개껌을 씹는 일이 그러했다. 낯설어서 한 걸음 물러나있었고, 솔직히 적응 과정에서 스트레스가 막심했다. 군견으로써의 생활이 저와 그럭저럭 잘 맞았다는 사실 역시 여전했고.
그런 조로에게, 산지는 성급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묵묵히 곁을 지키며 조로의 빈 부분들을 섬세하게 채워나갈 뿐이었다. 그 정성 하나 하나가 신뢰를 만들었고, 진심은 위로가 돼주었다.
-어, 둘이 웬일이야?
조로와 나미의 몸이 동시에 굳었다. 옆을 돌아보니 낮잠에서 깨어난 루피가 아직 졸음이 떨어지지 않은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잠기운이 완전히 물러나면 감당할 수 없이 왕왕대기 시작할 거다. 나미는 냉큼 욘지를 향해 턱짓했다.
-손님 왔어. 가봐.
-손님?
언제 꿈나라를 헤맸냐는 듯 눈망울이 곧장 반짝였다. 와아! 커다랗다-!! 짧은 다리가 무색하게 달려가는 속도는 어마어마하다. 조로는 슬쩍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사실은 저 조그만 녀석의 한도 없는 밝음 역시 제 적응에 크게 이바지했음을 떠올렸다. 나미와 다르게 루피는 조로의 태도가 어떻든 주위를 맴도는 걸 멈추지 않았다. 우울할 틈을 주지 않는 정신없음에, 하루는 스쳐가듯 넌 지치지도 않냐고 물어봤었다. 돌아온 대답은 꽤 놀라웠지. ‘외톨이가 되는 건 싫잖아.’
-사람이 되면 더 나을까?
-뭐하러?
-우린 항상 받기만 해야 하잖아.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분명했다. 조로는 루피의 침으로 범벅이 된 채 ‘거긴 눈이야! 안 돼!’라며 발버둥치고 있는 욘지를 보았다. 사람도 별 다를 거 없는 것 같은데….
-아까 같은 상황에도. 네가 사람이었으면 저 녀석이 더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
나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지금의 외모 역시 충분히 공포스럽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아니야…. 조로는 싱겁게 등 돌리는 나미를 잠시 주시하다, 루피의 눈곱을 떼어주며 웃고 있는 산지를 보았다.
-그런가?
“응, 좀 나갔다 올게. 아침에야 돌아올 테니 집 잘 지키고 있어.”
산지는 조로가 어디 가느냐 물었다고 착각한 것 같았다. 그는 조로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준 후 겉옷을 걸치고 욘지와 함께 사라졌다. 현관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조로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고. 자신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산지를 지켜낼 수 있을 만큼 강했다. 사람이 되면 뭐가 달라지지? 고민하던 차에 루피가 신발장에서부터 종종종 달려왔다. 산지를 쫓아가는 데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꿋꿋한 발랄함이었다.
-조로! 또 자? 자지 말고 나랑 놀자!
-…야.
-응?
절대로 시끄러워서 말을 돌린 게 아니다.
-너도 사람이 되고 싶냐?
-사람? 아니 별로?
-그럼 사람이 되면 더 좋은 점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야 많지!
의외의 대답에 조로가 슬쩍 눈을 빛냈다. 루피는 조로가 그게 뭐냐 되묻기도 전에 알아서 하나씩 꼽아내기 시작했다.
-일단 먹을 수 있는 게 늘어나지! 산지는 맨날 우리 먹으면 안 되는 거라면서 혼자 먹잖아!
-우리가 아니라 너겠지.
-음, 그리고….
먹는 걸로 끝이냐? 김이 새서 눈을 감아버리려던 찰나였다.
-대화를 할 수 있어!
-대화? 지금도 충분히 하잖아.
-그런 거 말고 바보야. 산지는 가끔 혼자 슬퍼하잖아. 우린 같이 살지만 이유를 알 수 없고.
응? 왜 그래? 깜짝 놀란 조로가 멍하니 쳐다보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 조그만 녀석은 가끔씩 이렇게 핵심을 찔러내곤 했다. 그 말이 맞았다. 산지는 매우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종종 소파나 탁자 앞에 앉아 그늘진 얼굴을 하곤 했다. 하지만 루피와 나미, 조로는 위로를 할지언정 무엇이 그를 힘들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산지는 그들에게 절대 푸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린 항상 받기만 해야 하잖아.’
-…….
-조로?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
“나 왔어~”
산지는 현관문을 열며 깨질 듯 아픈 머리를 쥐어 잡았다. 밤을 샐 생각은 없었는데…. 술이 들어가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해가 뜨고 있었다. 함께 아침을 맞은 무리들은 다 같이 해장을 하러 갔지만, 산지는 집에 밥을 챙겨줘야 할 아이들이 있었기에 먼저 돌아왔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이 미묘한 허전함은 뭐지? 그 정체는 신발장에 발을 들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루피의 마중이 없다. 손목을 걷어 시계를 보니, 평소 같았다면 자다가도 문 열리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달려 나왔을 시간이었다. 웬일로 밥은 안 찾고 늦잠을 자나? 그때 안쪽에서 뭔가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역시 우리 루피가 밥보다 잠일 리 없지. 웃으며 고개를 들었을 때.
“…으, 으아아악!!!”
공포에 찬 비명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다급히 뒷걸음질 치다 현관문에 막힌 산지는 허둥지둥 구두주걱을 다잡고 놀란 눈으로 다시 정면을 향했다. 그곳엔 전라의 남자가 서있었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에 사연을 알고 싶지 않은 상처로 외눈을 뜨고 있는 흉악한 남자가. 산지는 혼비백산한 정신을 추스르려고 노력했다. 우선 남자의 손엔 무기 같은 건 들려있지 않았다.-무기 없이도 사람 몇 명쯤은 충분히 죽일 수 있을 듯 한 주먹은 있었지만.- 남자는 그저 멀뚱히 서있었다. 잠시 어리둥절한 정적이 흘렀다. 그럼에도 산지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며 용기를 내 물었다.
“누구야 너.”
“…….”
“집엔 어떻게 들어왔어!”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지금 당장 문을 열고 뛰쳐나가 도움을 요청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러기엔 이 고요가 너무 신경 쓰였다. 아이들이 해코지를 당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남자가 문득 뭔가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곧바로 등 돌려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경악한 산지가 뒤를 쫓아 달려들었다.
“잠깐! 기다려!”
남자는 거실 중앙에 서서 산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 모를 행동에 혼란스러워하기 전, 소파 위에 나란히 앉아있는 루피와 나미가 보였다. 다행이다. 아무 일 없었구나! 루피와 나미는 산지가 돌아온 걸 아는지 모르는지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오직 나신의 남자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많이 놀란 것 같았지만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없음을 확인한 산지는, 나머지 한 마리를 찾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없었다. 덩치가 커 가장 먼저 눈에 띄었어야 했을 한 마리가. 산지는 간절한 걸음으로 남자를 지나쳐 부엌과 안방까지 살폈다. 없었다. 조로가 없었다.
“여기 있던 개 어떻게 했어.”
다시 거실로 돌아온 산지는 초조해할지언정 처음 신발장에 주저앉았을 때 같은 두려움은 온 데 간 데 없어진 채였다. 노려보는 두 눈의 새파란 분노에도 남자는 미동조차 없다. 대답해! 기어코 윽박을 지르니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새로 고개를 돌리는데, 쫓아가보니 남자는 루피, 나미와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저 엉뚱한 짓거리들의 반복도 슬슬 짜증스럽다. 이내 남자가 다시 산지를 마주했다.
“…뭐?”
대뜸 올라간 손가락이 가리킨 건 남자 자신이었다.
“무슨 소리야. 말 못해?”
“…….”
“여기 있던 개 어디 있냐고.”
이번엔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무슨 미친 소리…”
어이가 없어 미간을 찌푸리던 산지의 눈에, 순간적으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왼쪽 눈꺼풀 위를 길게 지나는 흉터가. 그 불길하게 낯익은 위치와 모양이. 미친…소리를…. 이 정신 나간 예감을 부정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헌데 루피와 나미는 평소답지 않게 인형처럼 굳어 이따금 눈만 깜빡거리고 있고, 그 반응이 또 이상해서 산지는 결국 남자와 다시 눈을 맞추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조로…?”
혼돈 속에 저만 태평한 그가 씨익 웃어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