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상디 흡혈박쥐
낙락 @nakrak01
태고의 환경이 그대로 남아있는 푸른 섬. 지금 써니호가 정박 한 섬은 위대한 항로의 초입에 있던 리틀 가든과 비슷하다.
"루피, 꼭 내려야 겠니?"
"응!! 당연하지! 도시락!! 상디, 가방에 넣어! 그럼, 간다!!"
상디에게 도시락을 받은 루피가 총알처럼 배에서 튕겨 나간다. 그런 선장의 모습을 본 나미가 깊은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저번에 리틀 가든에서 고생한 것을 다 잊어 먹은 건가."
긴 소매가 뺨에 닿자 그녀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오늘 나미의 옷은 평소와 다르다. 노출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단정하기 그지없는 옷차림이다. 이제 배에 의사가 있지만 열병에 걸려 고생하는 것만큼은 사양이었다. 우솝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완전 무장을 하고 있다.
"나미양, 옷이!!"
뒤늦게 나미의 옷차림을 발견한 상디가 울상을 짓고 엎어진다. 하지만 더 이상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 역시 리틀 가든에서 나미가 고생한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후후, 나도 그럼 나가 볼게. 이 섬은 제법 흥미가 당기네."
"좋아! 같이 가지. 괜찮은 목재가 많이 보인단 말이야."
"나도 가면 안 돼? 약초가 있는지 보고 싶어."
로빈이 제 주위에 붙은 프랑키와 쵸파를 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게 루피에 이은 두 번째 탐험조가 결성되었다. 아직도 바닥에 붙어 오열하는 상디를 가볍게 넘어선 탐험조가 배를 떠났다.
엎어진 상디의 위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조로가 상디를 발로 툭툭 건드린다.
"어이, 요리사. 저번에 승부 기억하냐?"
"...내가 이긴 거 말하는 거냐?"
"하? 내 코뿔소가 더 컸던 걸로 아는데?"
"무슨 소리냐! 내 도마뱀이 더 컸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난 상디가 과거를 회상하며 윽박질렀다. 둘의 다툼을 보는 나미가 고개를 젓는다. 어쩜 저렇게 변하지 않을까. 2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는 짓이 그대로다.
"사냥 시합이다!!"
"바라던 바다."
순식간에 사냥 팀이 결성 되었고, 갈라져 버린다. 따로 떨어져 숲으로 사라지는 조로와 상디를 보며 우솝과 나미가 울상을 지었다.
"나미, 이 상황 어디서 본 것 같지 않냐?"
"그러게…별 일 없겠지."
"...널 어떻게 믿냐~."
"내가 할 말이거든?!"
나미가 우솝을 향해 소리를 버럭 질렀다. 잠시 옥신각신하던 둘을 말린 건 브룩의 등장이었다. 남매처럼 토닥거리던 둘은 금세 표정을 바꾸고 브룩에게 달려간다.
"브룩! 넌 내리면 안 돼! 이 몸이 지켜주마, 음핫핫!!"
당당하게 말하는 우솝을 보며 나미가 못 말리겠다는 웃음을 지었다. 얘도 2년전이나 지금이나 하는 짓이 그대로인 듯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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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내가 코뿔소 인가."
상디의 앞에는 거대한 공룡의 사체가 엎어져 있다. 몇 번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상디의 입 꼬리가 올라가 있다. 전에 잡은 것 보다 훨씬 큰 녀석이라는 확신이 든 탓이다.
"이크, 피가 다 튀었네."
담배에 불을 붙이다, 제 손에 뭍은 피를 보곤 인상을 찌푸린다. 공룡이 뿜는 피를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너무 세게 찬 걸까. 바닥을 적시고 있는 붉은 액체를 보며 그가 필터를 잘근 씹는다. 고기가 상할까 싶어 한 군데만 차긴 했는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거대한 뿔을 잡았다.
거대한 사체를 질질 끌며 그가 고개를 젖힌다. 찌를 듯 솟아오른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간신히 찾은 틈새에는 붉은 빛이 쏟아져 내린다. 제법 저물어 가는 하늘에 상디의 눈이 절로 찡그려 진다.
"서둘러야 겠군."
이러다 저녁 준비에 늦을 것 같았다. 큰 놈을 찾으러 시간을 너무 낭비 했군. 작은 자기반성을 한 그가 뿔을 단단히 고쳐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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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길. 여긴 또 어디지. 이 동굴 본 것 같은데."
큰 동굴을 앞에 둔 조로가 뒷목을 쓸어 내렸다. 사냥은 일찌감치 끝났건만, 그는 아직도 배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왔던 길을 반복하며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다. 어찌나 같은 곳을 맴돌았는지, 끌고 다니는 공룡의 사체로 주변의 바닥은 황폐하게 변해 있을 정도다. 물론 조로는 그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난감한 듯 주변을 살피던 조로가 눈을 감는다. 제 동료의 기척을 찾기 위함이다.
"엉?"
얼빠진 소리를 낸 그가 눈을 번쩍 뜬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빽빽한 덤불로 뒤덮인 곳에 시선을 고정했다. 적을 맞이하는 듯 한 불만이 가득한 표정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길치 자식."
잠시 후,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걸어오는 상디가 모습을 드러냈다.
"너, 이런 데서 뭘 하는 거냐."
"뭘 하긴, 너 데리러 왔다. 바보냐? 같은 자리만 뱅글뱅글 돌게. 숲을 폐허로 만들고 말이야."
상디가 긴 손가락으로 패인 길을 가리킨다. 질질 끌고 다니던 공룡의 자국으로 땅은 엉망이었다. 그의 손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던 조로가 인상을 쓴다. 하지만 뒷말은 하지 않았다. 바보라는 말에는 짜증이 나지만, 길을 잃은 건 사실이니까.
"뭐야, 그 작은 건. 도마뱀이냐?"
"아앙?"
손가락이 바닥에서 조로의 전리품으로 향했다. 리틀 가든 때와 정확히 바뀐 서로의 사냥감이다. 제 도마뱀이 작다는 소리에 조로가 발끈 한다.
"뭐라는 거냐. 어딜 봐서 작다는 건데? 네 코뿔소야 말로 코딱지만 하군."
"하? 잘 봐! 내 코뿔소가 더 커!!"
"역시 네 눈알은 장식품이군. 내 도마뱀이 더 크다고!!"
"장식품? 잘 봐! 비교해주지!"
아예 이곳에서 크기를 재어 보자며 상디가 제 코뿔소를 던진다. 쿵- 하며 바닥이 크게 울렸다. 나무가 흔들려 커다란 나뭇잎들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둘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전리품의 대단함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멍청아! 뇌까지 마리모가 된 거냐?"
"너야말로 에로 함이 뇌를 점령하고 있겠지!"
서로에 대한 의미 없는 비난으로 번져나가니, 두 남자의 언성이 높아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조용해지는 건 상디가 담배를 꺼내 무는 그 순간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새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자, 두 남자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야, 에로쿡, 무슨 소리 안 들리냐?"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조로다. 상디의 예민한 귀에도 낯선 소리가 들려왔고, 빠르게 위치를 파악한다.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상디가 조로의 어깨너머를 바라본다. 그의 푸른 눈에 비치는 것은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거대한 동굴의 입구다.
'동굴. 동굴에는 뭐가 살지? 아...설마.'
상디가 재빨리 하늘을 올려다본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빨갛다. 벌써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리가 어느새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드럼 왕국에서의 눈사태 마냥 거대한 덩어리들이 뭉쳐 다가오는 듯 했다.
"무슨 일인데?!"
심상치 않음을 느낀 조로가 상디의 어깨를 꽉 부여잡는다. 그 순간 상디의 입에 물린 담배가 바닥에 떨어졌다. 평소라면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를 아까워했지만, 상디의 머릿속에는 담배의 생각 따위는 없다. 조로의 등 너머의 새까만 동굴에서 거대한 소리의 덩어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까.
"빌어먹을!! 조로, 엎드려!!"
상디의 입에서 욕설과 고함이 터지자, 조로가 뒤를 돌아보려 한다. 그러면 늦다고! 다급한 마음에 상디가 양 팔을 뻗어 조로를 몸에 가둔다. 그대로 발에 힘을 실어 몸을 쓰러뜨렸다.
"뭐하는 짓이냐!"
거친 목소리가 상디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상디는 개의치 않고 조로의 몸을 뒤집는다. 졸지에 바닥에 얼굴을 처박은 조로가 으르렁 거린다. 충분히 제 몸에서 상디를 치울 수 있지만 조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개 같은 상황이 벌어진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박쥐?!"
"그래! 이제 저녁이라 먹이사냥을 하러 나오는 거라고!"
상디의 고함은 수 만 마리의 박쥐 떼에 파묻힌다. 조로의 몸에서 떨어지려 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언젠가 제프 영감한테 들은 이야기가 상디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박쥐 동굴을 발견하면 절대 근처에 가지 말라는 경고다. 혹시나 마주치면 피하거나, 숨어라. 하나의 개체는 약하기 짝이 없지만, 그들이 퍼뜨리는 전염병이나 뭉쳐서 하는 공격은 무섭기 짝이 없다는 이야기였다.
일당백의 조로와 상디라도 수 만 마리의 박쥐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둘 다 당할 바에는 한 명만 피해를 입는 게 낫다. 비록 그게 자신이 될지라도.
'제기랄, 이 자식은 왜 반팔을 입어서!'
희생적인 생각을 하고 있지만, 조로에 대한 욕은 멈출 생각이 없었다. 박쥐들에게 핏줄이 도드라져 보이는 조로의 팔뚝은 싱싱한 먹잇감으로 보일 것이다.
상디는 조로의 뒤통수를 턱으로 꾹 누르며 그의 팔을 감쌌다. 어쨌든 최대한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게 최선이었다. 다행히도 조로가 만든 패인 바닥은 몸을 숨기기 안성맞춤 이었다. 상디의 바람대로 조로의 몸이 완전히 가려졌다.
[ 키이이잌!!! ]
날카로운 박쥐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상디는 박쥐 동굴 앞에서 난리를 피운 자신을 욕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망할 박쥐 떼들이 빨리 떠나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그의 바람은 산산이 부서진다. 두 남자의 뒤에는 갓 잡은 거대한 먹이 감이 두 마리나 있으니까.
귓가에 퍼덕이는 날개 짓 소리가 어마어마했다. 상디는 청각이 마비되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제 등을 찢고 있는 날짐승의 발톱과 이빨이 주는 감각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했다.
그것은 조로도 마찬가지였다. 박쥐의 날개 소리와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귀를 때리고 있다. 그리고 가장 큰 소리는 제 위에 엎어진 상디의 목소리다.
"크...흐...가만,히. 있...어."
사실은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점점 사그라지고 있다. 조로는 희미해지는 상디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를 꽉 물었다.
제 몸을 덮고 있는 상디를 치워내려면 벌써 하고도 남았다. 박쥐 따위, 뭐가 무서워 이렇게 땅에 얼굴을 박고 있을까. 하지만 상디의 작은 목소리에 묶인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둘에게 아득한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상디의 음성이 사라질 때 쯤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던 박쥐 떼들의 소음도 멀어졌다.
"끝...났나?"
조로의 입가에 붙은 흙이 우수수 떨어졌다. 분명히 조용해 졌지만 아직도 귓가에 그 끔찍한 소리의 여운이 남아 있다. 조로가 천천히 몸을 들자 그의 등에 자리 잡고 있던 상디의 몸이 옆으로 굴러버린다.
"어이, 괜찮나?"
재빨리 몸을 일으킨 조로가 상디의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려 한다. 그의 커다란 손이 상디의 등에 닿았고, 조로의 표정이 한 없이 구겨졌다. 어깨를 잡아 조심스레 상디의 몸을 일으킨 조로가 그의 등을 살핀다.
"빌어먹을."
욕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상디가 걸친 옷은 다 찢겨져 이미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처투성이의 등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피와 살점이 뒤엉켜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등뿐만이 아니었다. 밖으로 드러난 부분 전부가 그러했다. 뼈까지 보이는 참담한 광경에 조로의 안에서 격한 감정이 거세게 요동친다.
"빨리 쵸파한테..."
제 감정을 풀 때가 아니라는 건 그도 알고 있다. 지금 중요한 건 바로 상디니까. 상디의 코 밑에 손을 갖다 대니 미약한 숨이 느껴졌다. 정신을 잃었지만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작은 숨 이라는 게 문제이지만.
조로는 최대한 환부에 접촉을 작게 하며 상디를 안아 들었다. 그렇다 해도 아플 텐데 상디는 그야말로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을 뿐이다. 이미 다 먹혀 뼈만 남은 사냥감을 뒤로하고 조로가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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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파!! 쵸파!!"
목에 핏대를 세운 조로가 쵸파를 부르며 달리기 수십 분째.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동물형으로 변한 채 달려 온 쵸파를 드디어 마주 할 수 있었다.
"조로, 다쳤어? 에?!! 상디?!! 의사!! 의사!!!"
쵸파는 조로의 팔뚝을 따라 흘러내리는 진득한 피들을 보고 놀라 다가왔다. 가까이 오고 난 후에서야 엄청난 출혈이 상디의 것이라는 걸 깨닫는다. 당황한 쵸파에게 조로가 소리를 지르고 만다.
"쵸파! 진정해!"
"으, 내가 볼 수 있게 눕혀. 빨리!"
"박쥐한테 당했다. 뒤쪽이 엉망이야. 체온도 많이 떨어 진 것 같고."
바닥에 상디를 내려놓은 조로가 쵸파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재빨리 인수태로 변한 쵸파가 그의 말을 들으며 상디를 살폈다. 작은 발굽이 쉴 새 없이 움직이다, 우뚝 멈추자 조로가 인상을 쓴다.
"배로 가야하나? 약은 배에 있지."
"...조로…"
"앞장 서, 안고 달리마."
"조로, 상디는…"
"뭐하는 거야, 쵸파! 빨리 변신하라고! 시간이 없잖아!"
머뭇거리는 쵸파를 보며 조로가 윽박질렀다. 마치 쵸파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말을 가로 막으며 재촉한다. 평소에 쵸파에게 관대한 조로 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외눈 검사의 사나운 기세에도 불구하고 쵸파는 변신하지 않았다. 말없이 동그란 눈으로 조로를 올려다본다. 물기가 가득한 눈에 눈물이 가득 차올라 있다. 차오른 눈물이 결국 흘러 넘쳐 버렸다.
"쵸파, 내가 소리 질러서 우는 거냐? 지금 울 시간이 없다는 건 너도."
"죽었어."
"농담하지마라."
"이미...죽었다고. 으흑...흑흑…"
울먹거리며 죽음을 말하는 앳된 목소리에 조로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어느새 쵸파는 상디의 가슴팍에 엎어져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처럼 울고 있는 쵸파를 조로가 망연한 눈으로 내려 본다.
죽었다니. 누가, 요리사가? 조금 전까지 작지만 숨이 붙어 있었는데?!
상디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은 조로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피 범벅이 되어 떨리고 있는 손이 제 것이 아닌 듯 했다. 조로는 코 밑에 가져간 손을 한참동안 거두지 못했다. 그의 손끝에 맺힌 핏방울이 상디의 얼굴에 흘러내려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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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디의 시신이 써니호에 옮겨지고 그의 죽음이 밀짚모자 해적단 전체에 전해진다. 처음 루피는 조로의 탓이라 생각해 그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로빈의 저지로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요리사씨의 판단은 옳았어.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둘 다 죽었을 거야. 루피, 너도 아까의 박쥐 떼를 함께 봤잖아?"
로빈이 차분하고 쉽게 루피에게 설명했다. 유적지를 많이 다녀본 로빈은 박쥐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동굴을 발견하고 곧바로 루피를 일행에 합류 시켰다. 박쥐를 보고 루피가 달려들까 걱정이 된 탓이었다. 박쥐 떼들은 가까이 가지 않는다면 괜찮으니까. 그래서 동굴에서 멀리 떨어 진 곳을 돌아다니고 있던 차였다.
로빈은 다른 이들이 굳이 박쥐를 도발 할 리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판단은 훌륭히 빗나가고 만다.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알았을까? 조로와 상디가 박쥐 동굴의 앞에서 먹잇감을 놓고 싸우고 있을 줄을.
"…"
조로는 아무 말 하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조로의 안에서 요동 쳤던 격한 감정의 종류가 바뀌고 있다. 처음에는 제 자신에 대한 분노였고, 답답함 이었다. 그것은 이제 무겁디무거운 죄책감이 되어버렸다.
내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냥 상디의 코뿔소가 더 크다고 했었다면. 아니, 애초에 사냥 시합을 제안 하지 않았다면...상디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상념이 끝없이 이어져 깊은 후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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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이 되었다. 상디의 시신은 전망대에 안치 되어있다. 크루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사실상 조로만 이용하는 곳이라 나름 조용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로도 원하는 일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방에서 상디의 죽음을 슬퍼하고, 조로는 배의 후미에 홀로 앉아있다. 멍하니 밤바다를 바라보던 그의 손이 허리에 찬 검에 올라간다.
화도문일자.
그의 가슴속에는 버리지 못한 어린 친우의 이름이 언제나 남아있다. 최강의 검사가 될 것을 같이 다짐한 쿠이나. 그 목표를 위해 지금껏 달려왔다.
하지만, 그 녀석의 목표는? 어떻게 되는 거지?
조로가 천천히 고개를 든다. 둥근 달이 그의 눈에 가득 차오르고, 불이 꺼진 전망대에 시선이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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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키가 만든 관에 누워있는 상디가 누워있다.
쵸파가 정돈을 해주었는지 잠들어 있는 것처럼 평온해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로가 상디의 코끝에 손을 가져간다. 하지만 온기도 숨결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신의 보호를 위해 온도를 낮춘 관 탓에 서늘한 기운이 밀려 들어왔다.
배 위에 가지런히 모여 있는 상디의 손 등 위에 조로가 손을 겹친다. 매끈한 손 등은 따끈해 보이지만 지나치게 차가웠다.
"...상처가?...쵸파가 치료 했나보군."
깨끗한 손을 보고 조로가 쓰린 미소를 지었다. 뼈가 보일 정도의 심각한 상처였는데. 이렇게 고치다니.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는 걸까. 애꿎은 생각임을 알지만,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고 만다.
관의 옆에 기대어 앉은 조로가 깊게 한 숨을 내쉬고 입을 연다.
"멍청한 자식. 박쥐 따위에 죽다니…"
"…"
대답 없는 이에게 싫은 소리를 내뱉고는, 그가 곧바로 후회한다. 사실은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었는데. 조로가 제 입술을 세게 깨문다.
자학적인 행동은 피가 나고 나서야 멈추었다.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 돌고, 코끝에 닿는다. 저를 감싸고 피를 흘렸던 상디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올 블루는 내가 꼭 찾아주마."
"…"
"그 다음에 레스토랑의 영감한테도 가자."
"…"
"그때까지는 묘비도 못 만들어 줄 것 같다."
"…"
"...미안하다. 상디."
"…"
말을 마친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의 뚜껑에 손을 올리고 닫기 전 마지막으로 상디의 얼굴을 바라봤다.
"사냥 시합은, 네 승리다. 생각해 보니 네 녀석 것이 더 컸던 것 같다."
"이제 인정 하는 거냐. 마리모?"
"그래. 내가 졌다."
제 패배를 순순히 인정한 조로가 천천히 뚜껑을 내리려다 멈춘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이상해서 가만히 듣고 있었는데, 네가 왜 오올 블루를 찾는데? 묘비는 무슨 말이고."
"너...너…?!"
조로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답지 않게 놀라는 조로를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은 상디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본 그가 눈살을 찌푸린다.
"뭐야...전망대? 이건 또 뭐냐. 관? 아...근데 왜 이렇게 배가 고프지."
말하며 상디가 제 배를 움켜쥐었다. 달콤한 냄새가 그의 코끝을 스쳤다. 분명히 이상한 상황이지만 더 이상 따져 묻고 싶지 않을 정도의 유혹적인 향이었다. 요리사인 자신조차 처음 맡아보는 향기. 이상할 정도로 허기 진 속을 달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조로, 너 먹을 것 가지고 있냐? 너에게...나는데."
"...귀...신이냐?"
"하아? 무슨 소리야? 됐고, 빨리 와봐. 빨리."
상디가 창백한 안색으로 다급하게 말하자, 조로의 발이 주춤거리며 다가간다. 조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분명 죽었다. 상디는 죽었다. 그것도 제 품 안에서. 하지만 이 상황은 뭐란 말인가. 상디가 일어나서 말하고 있다. 물론 관 안이고 뭔가 이상하지만.
한편 상디는 느릿하게 다가오는 조로가 답답했다. 마리모 따위가 가까이 오는 건 불쾌한 일일 텐데 이상한 기분이었다. 조로의 팔뚝이 탐스러워 보였다. 정확히 말하면 도드라져 보이는 핏줄 안의 뜨거운 피가. 입 안에 고이는 침으로 상디가 입술을 축인다.
"네 팔. 아니, 너 입술에 상처 있잖아?"
"아아...그냥 피만 조금 난거다."
상디는 달콤한 냄새의 근원지를 찾고 만다. 찾았다. 바로 저 곳이야. 못 참겠어. 제 지배를 벗어난 생각이 상디의 몸을 움직였다. 관에서 뛰어나온 그가 조로의 앞에 순식간에 자리를 잡았다.
"조로, 내가 지금 너무 배가 고프거든."
"식당에 갈 거면."
"네 입술 잠깐만 빨면 안 되냐."
"하아?"
상디는 제가 말했지만 미친 소리라는 생각을 하고 만다. 하지만 이 허기를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허기를 달래줄 대상이 코앞에 있다. 제대로 인상을 구긴 조로를 무시한 채, 상디가 그의 아랫입술을 빨아들였다.
혀끝에서 부터 달콤하기 그지없는 맛이 퍼져나갔다. 처음 맛보는 진미였다. 그것은 부드러운 살결 사이에서 아주 조금 새어 나오는 터라,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더, 맛보고 싶어. 이것을 입에 가득 머금고 마시면 이 허기를 없앨 수 있을까.
날카로운 치아가, 조로의 입술에 파고들었다. 그 순간, 과즙처럼 달콤한 액체가 상디의 입 안으로 흘러 넘치듯 들어왔다.
졸지에 아랫입술을 물리고 빨리자 조로는 어이가 없었다. 입술에서 퍼지는 알싸한 통증은 절대 꿈이 아니었다. 죽었던 상디가 일어났고, 제 입술에 피를 내어 마시고 있다. 이것은 모두 현실이다.
남자가 입술을 빨고 있지만 뿌리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차가웠던 상디의 체온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는 듯 했으니까.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부족해."
끈질기게 입술을 핥고 물던 상디가 떨어져 나와 뱉은 말에 조로가 인상을 쓴다.
"피가...마시고 싶은 거냐?"
"...그래."
"하...알겠다."
한숨을 뱉으며 조로가 긴 소매를 걷어 손목을 내밀었다. 입술을 빨리는 동안 조로는 냉정하게 상황을 파악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상디가 흡혈귀 같은 상상 속의 괴물이 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째서, 왜? 라는 의문은 필요 없었다. 오히려 살아난 상디를 얼싸안고 기뻐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물론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지만.
내민 조로의 손목을 보고 상디가 주춤거린다.
"왜? 물어도 괜찮다."
"...너 검사 잖냐."
"하...너는 정말…"
조로는 뒤의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인 제 입술을 물어뜯을 정도로 피를 갈망 해 놓고. 자기 몸이 다 뜯겨 나가는 순간에도 가만히 있으라고 했으면서. 어디까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셈인지.
한편으로는 상디가 괴물이 되었지만 역시 그대로 라는 생각을 하고 만다. 변함없음에 상처를 받았지만 안도감이 들었다.
붉게 상기된 상디의 뺨을 보며 조로가 한숨을 쉬었다. 피를 내주는데 이 녀석이 신경 쓰지 않는 부위까지 골라야 하다니. 그러다 조로가 헛웃음을 짓는다. 상디의 꿈을 위해 검호가 되는 꿈을 미루려고 까지 생각 했었는데. 이 정도 쯤은 고민의 축에도 들지 않는 것이다.
"목은 괜찮아."
조로는 벌어진 상의의 깃을 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내밀었다. 그 모습에 상디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만다. 한 번 자제를 했지만, 더 이상은 참기 어려웠다. 저 탄탄한 근육 아래 꽉 차있을 것들을 마시고 싶었다.
상디의 손이 조로의 목을 감싸 안는다. 그가 목과 어깨로 이어지는 살을 붉은 혀로 쓸어 올리고, 원하는 곳을 날카로운 송곳니로 고른다.
간질거리는 느낌과 이어질 통증에 조로의 신경이 온통 그곳에 쏠렸다. 급소를 파고드는 느낌은 그리 좋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입술을 뜯겼을 때보다는 덜 아팠다. 마치 모기에 물린 듯한, 간지러움과 열기가 느껴졌다.
파고드는 느낌이 그러했다면, 빨리는 느낌은 색달랐다. 격렬한 전투에서 맛 볼 수 있는 흥분이 조로의 전신을 휘감았다. 늘 수양을 쌓는 조로조차 참기 힘든 감각이었다.
아래로 내린 손이 몇 번이나 펴고 쥠을 반복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몸에 매달린 상디의 허리를 꽉 안아 버릴 것 같았다.
'하...우솝이나 루피는 못 견디겠군. 이 녀석이 여자의 피를 빨리는 없고.'
조로는 애써 다른 생각을 한다. 상디가 피를 마셔야 한다면, 줄 사람은 누구인가에 대해서다. 절제력이 부족한 루피와 우솝은 무리, 쵸파는 아마 기절 할 수도 있다. 여자는 무리였고. 뼈만 있는 브룩이나, 전신이 기계인 프랑키도 불가능하다.
결국 남은 건 조로, 자신뿐이다.
'차라리 다행이군.'
조로는 저만 남았음에 안도했다. 상디가 살아났지만 죄책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상디가 피를 원한다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 피쯤이야. 한숨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질 테니까.
"하…"
목덜미에서 만족스러운 탄성이 터졌다. 실컷 삼킨 상디가 제 잇자국이 남은 곳을 혀끝으로 핥아 올린다. 흘러내리는 붉은 액체가 아깝다는 듯 한 미련 가득한 행동이었다.
"이제...괜찮나?"
조로의 목소리에 상디의 귀에 닿자, 그 행동이 비로소 멈추었다. 이제야 제 정신이 돌아온 듯 상디는 자신이 빨고 있는 것을 또렷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이게...대체…"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욕설을 뱉었다. 뺨과 양 귀가 잔뜩 붉어져버렸다. 조로는 축축한 제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연다.
"너 죽었다. 아까 박쥐한테 공격당해서. 그런데 흡혈귀 비슷한 게 되서 살아난 것 같아."
"자...잠깐만? 내가 죽었다고?"
"그래. 뭐 이제 상관없지. 쵸파나 로빈한테 물어보면 되니까."
"아니, 흡혈귀 비슷한 거라니…그래서 내가 네 피를?"
입을 가리며 상디가 조로의 입술과 목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차라리 기억이 없으면 좋으련만. 저 살을 입에 머금고 물고, 빨아들인 기억이 생생했다. 그 맛과, 감촉은 그야말로 끝내 주기까지 했다.
"...빌어먹을."
"배고프면 말해라. 다른 애들한테는 말하지 마. 너한테 빨리는 느낌 장난 아니니까."
"하아?"
"너한테 빨리면 흥분된다고."
조로는 피가 몰린 제 아래를 가리켰다. 무덤덤한 표정과는 달리 옷 위로도 성이 난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상디가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미친 소리처럼 들리지만, 조로가 말하는 것이 모두 사실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제 몸이니까 더 잘 알 수 있다. 전보다 더 예민해진 감각이 몸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었다.
이건 꽤 충격이긴 하지만, 견딜 수 있었다.
지금 그를 절망에 빠뜨린 건, 배에서 제공 받을 사람은 정말 조로뿐이 라는 사실이다. 피 맛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미리 뽑아 둔 그런 피가 아니라, 혈관 안에 돌아다니는 생생한 피를 먹어야 한 다는 것을.
요리사라서 맛보지 않은 혈액 팩의 맛을 추측했나? 라는 실없는 생각을 상디가 하고 한다.
"...난 괜찮다."
엎드린 상디에게 조로가 다가와 말을 건넨다. 그의 무덤덤한 말에 상디가 고개를 들어 버럭 소리 질렀다.
"뭐라는 거냐! 남자한테 피나 빨리는 게 괜찮다는 거냐?!"
"괜찮을 리가 없지."
부정적인 대답에 상디의 인상이 와락 일그러져 버렸다. 나도 싫거든! 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조로의 피 맛은 너무나 좋았다. 그의 거절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고 말았다.
"네가 살 수 있다면 상관없어. 괜찮기 보다는 엄청 좋았으니까. 부담 갖지 마라."
"하아?"
"흥분한 거 봤잖냐. 좋았다고. 일단 일어나라. 동료들에게 말해야 하니까."
상디를 일으켜 세우고 그가 앞장 서 걷는다. 상디는 평소와 다름없는 조로의 뒷모습을 얼빠진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흥분했다고 말한 사람치고는 걸음걸이에는 흔들림을 찾아 볼 수 없다.
'정말 괜찮은 건가?'
자신이 피를 마시는 흡혈귀가 된 것도, 그의 피를 마셔야 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아 하고 있다. 마치...이상한 고민 따위는 하지 말라 말하고 있는 듯하다.
빨리 따라오라는 조로의 무심한 손짓에 상디가 무거운 발걸음을 떼었다. 조로의 바람처럼 그는 쓸데없는 고민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
그 탓일까, 첫 발은 무거웠지만 두 번째 부터는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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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 써니호는 한바탕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슬픔의 눈물이 아닌 당연히 기쁨의 눈물이었다.
아무도 상디가 흡혈귀로 변해 버린 것에 개의치 않아했다. 피를 내어 주겠다는 나미의 말에 상디는 기겁하며 도망치기 까지 했었다.
로빈은 고문서를 찾아 상디가 공격받은 박쥐 중에 고대의 흡혈 박쥐가 있었음을 알아낸다. 다만, 죽었던 그가 어떻게 살아 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상디의 집안 내력을 물어보던 로빈은 그의 씁쓸한 표정에 질문을 거두었다.
동료들은 그대로지만 흡혈귀가 되어서 변한 것은 있었다. 햇볕이 쨍쨍 할 때는 선글라스를 낀다. 오감이 발달되어 전투력이 상당히 높아지고 회복력은 매우 월등해 졌다. 잘 때는 그야말로 죽은 듯이 잠들었다. 식사는 할 수 있지만, 그의 허기를 달래는 건 혈액 뿐이었다. 그리고 그 혈액 제공자는 조로다.
상디의 식사 장소는 그의 관이 있던 전망대가 되었다. 짧았던 식사 시간이 길어지고, 두 남자의 젖은 숨이 터져 나오기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흥분을 이기지 못해 시작된 관계지만 상디와 조로는 만족했다. 이미 둘 사이에는 우정 이상의 무언가가 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의외로 두 남자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
물론 조로와 상디를 바라보는 밀짚모자 동료들은 일찍부터 사랑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말이다.
